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담임목사 목회칼럼

담임목사 목회칼럼

한국을 다녀 왔습니다

 

 

주간에 24(?) 의 일정으로 한국을 다녀왔습니다. 암 투병으로 고생하시는 장인 어른을 뵙고 응원하고 또 기도 해 드리려고 다녀온 여정인데, 너무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. 제가 명색이 맏사위인데요, 오랜 동안 잘 뵙지도 못했고, 사람 노릇도 잘 못했거든요. 그래서 이번에는 손도 잡아 드리고, 다리도 주물러 드리고, 또 함께 예배도 하고 그랬습니다. 수 십 년을 머무신 낡은 연립 주택 3층을 오르는데, 그분과 얽힌 여러 개의 추억들이 떠 올랐어요.  

 

신학교 졸업 반의 어느 날,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, 선물용 정종을 한 병 사들고 인사를 드리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. “어짜피 한번은 부딪쳐야 될 건데…” 호기롭게 쳐들어 간 거죠. 예상대로 네 까짓 게 내 딸을 넘봐?” 당신은 싸늘한 눈 빛으로 저를 대하셨습니다. “신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나오고 목사 안수 받으면대충 한 서른 살 쯤 될 테니까 그 때쯤 결혼 이야기를 해 보자고…” 선수를 치셨어요. 저는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. “여기서 밀리면 끝이다.” 해서 솔직히 말씀 드렸습니다. “이미 연애를 오래 했고, 이대독자인데 어머님도 편찮으시고하여 결혼을 서두르고 싶습니다.” 그 이야기를 들으신 당신, 벌떡 일어나 부엌을 향하셨죠. 살짝 보니, 당신은 그 타는 속을 소주로 달래고 계셨습니다. 인사를 드리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나왔어요. 어이구, 그 날 한 대 안 쳐 맞은 게 다행입니다. 저는 진짜 가진 것도 갖춘 것도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었거든요. 저희는 그 해에 결혼했습니다.

 

대관령의 전도사님 사택은 일년에 오 십 만원짜리 단칸 방이었습니다. 부엌에는 늘 얼음이 얼어 있었고 때론 수도가 동파 되어 물난리를 맞기도 했습니다. 화장실은 마당을 가로질러 저 밖에 있었고, 첫 아이를 임신했던 아내는 연탄개스를 맡아 큰일 날 뻔 하기도 했습니다. 돌 잔치 때 처음 방문 하셨던 당신은, 베니아판들을 사 직접 단칸방의 바깥쪽 문 벽을 막아 주셨죠. 몇 년 후 태백의 탄광촌에서 목회 할 때도 한번 오셨는데,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. “그 시커먼 탄광촌의 딸 집을 찾아 오시면서, 당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…?” 어느 날, 사위 목사 체면도 있고 하니 한번 믿어는 줘야 겠지?” 동네 교회를 나가셨는데, 이분에게 믿음이 들어갔습니다. 가끔 전화통화를 엿들으면, 당신 찬송도 잘 하신다고 자랑도 하시고, 또 어느 날은 집사가 되셨다고 자랑하십니다. 구역 예배도 나가시며, 헌금도 꼬박 꼬박 하신답니다. 그래도 허풍은 여전 하세요. 이번에도 의사에게 큰 소리로 이러셨대요. “우리 사위, 엘에이에서 제일 큰 교회 목회합니다!” 에궁~

몇 년 전 후두암 수술 전, 목소리를 잃게 될 거라는 말을 들으시고 했던 첫 마디는, “이제 찬송은 어떻게 부르냐…” 셨습니다. 저는 주님이 그 말을 들으셨다고 믿습니다. 기적적으로 성대를 잃지 않고 수술을 마치게 되셨어요. 몇 년을 잘 오셨는데, 간암이 재발 되어 이번에 많이 힘들어 하시네요. 명색이 목사인데 함께 예배하기로 했습니다. “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온 식구가 함께 부르는데 가슴이 먹먹합니다. 제 장인의 인생을 사랑으로 추적 하셔서 결국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어 내신 그 은혜가 너무 너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. 기도하는데, 장모님도 큰 소리로 아멘 아멘 하시네요. 주님이 어떻게 저들을 사랑하셨고 또 어떻게 추적해 오셨는지를 아는 저로써는 감사치 않을 수가 없어요. 주의 은혜가 정말로 족합니다.